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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함안예총
작성일 2009-10-12 (월) 15:14
ㆍ조회: 1552    
시래기 - 이상규

 


시래기 - 이상규



   새벽 서호시장 도라무통에 피는 불꽃이 왁자하였다/ 어둑어둑한 등으로 불을 쬐는 붉고 튼 손들이 왁자하였다/ 숭어를 숭숭 썰어 파는 도마의 비린내가 왁자하였다/ 국물이 끓어 넘쳐도 모르는 시락국집 눈먼 솥이 왁자하였다/ 시락국을 훌훌 떠먹는 오목한 입들이 왁자하였다. -안도현의 시 ‘통영서호시장 시락국’ 전문-

  꽁꽁 언 겨울 새벽시장. 장거리를 거간꾼에 맡긴 사람이나 난전 자리를 잡아 놓은 사람들이 아직 전을 펴기에도 장돌림을 하기에도 이른 시각, 언 손도 녹이고 빈속도 데울 겸 시락국집에 모여 든다. 토장을 듬뿍 풀고 맵싸한 고추를 듬성듬성 썰어 넣고 끓이는 시락국이 콧구멍을 들쑤시고 뱃속을 요동치게 한다. 별스런 재료도 없이, 막멸치 한 주먹 넣고 돼지 정강이뼈라도 한 토막 우려낸다면 감칠맛이다. 따라 나오는 반찬이라야 무우청이 강아지꼬리 만큼이나 길게 달린 총각김치 아니면 시래기 중에 성한 것을 따로 가려 희아리가 겨우 고춧가루 모양을 낸 배추 생김치사발이다.

   저마다 새벽길을 재우쳐 오느라 빈속이 헛헛할 것이다. 반으로 토막을 낸 도라무통에는 장작불이 활활 탄다. 차례를 기다리며 비좁은 틈새를 비집고 곱은 손부터 먼저 녹인다. 앉을 자리는 벌써 다 차버렸다. 그 역시 도라무통으로 만든 탁자에는 먼저 시락국을 받아든 몇 사람이 콧물을 훔쳐가며 뜨거운 국물을 훌훌 들이 마시고 있다. 거기에 막걸리 한 사발을 얹으면 더 덮을게 없다. 국물을 몇 모금 후룩이고 나서야 손바닥에 땀이 돌고 굽은 허리가 바로 펴진다. 이제야 옆 사람이 보인다고 고춧가루 낀 잇몸을 드러내고 아는 사람끼리 마주보고 웃는다.

   김장거리를 가리고 남은 진이파리 중에서 그나마 싱싱하고 성한 것을 골라 엮어 말린 것이 시래기다. 볏짚 세 가닥으로 아이들 댕기머리 땋듯이 엮는데 이파리 한 손 묶음을 한 모숨이라 하고 스무남 모숨이 한 갓이다. 시래기는 행랑채나 헛간 처마 밑처럼 그늘에 말려야 푸른 빛깔도 살거니와 제 맛이 난다. 푸성귀가 귀한 겨울철 반찬거리로는 김치 다음이다. 지금은 겨울에도 싱싱한 채소를 얼마든지 구할 수가 있지만. 그래도 옛날 입맛은 변하지 않아 겨울철에 묵은 것을 찾는 사람들에게 시래기는 잊고 있던 지난날들을 돋움 새긴다.

   갖은 사람들이야 거들떠 보겠냐마는, 그래도 우연찮게 시락국을 만나면 싫어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몸속에도 시래기 맛을 읽어내는 DNA가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의 아버지나 할아버지까지 연줄을 댄다면 시래기 국, 시래기나물, 시래기죽을 수 없이 먹었을 테니까. 우리가 이렇듯 시래기에 끌리는 것은 바로 거기에 고향 냄새가 있고 어머니와 할머니의 손맛이 있기 때문이다. 겨울철에 어쩌다 수더분하고 만만한 식당에 가면 시래기 반찬을 만난다. 시래기를 넣은 고등어조림이나 생된장을 넣어 막 주물어 나온 시래기나물이면 그냥 반갑다. 주방에다 대고 시래기나물을 목청껏 더 청하는 사람도 진즉부터 아는 사람처럼 낯이 익다.  

   이제 곧 김장철이 다가온다. 푸른 잎은 모조리 벗기고 노란 알속만 챙겨가는 김장배추를 보면 겉잎은 어쨌을까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시래기가 쓰레기라는 말과 비슷해서 그런지 요즘 사람들은 우거지란 말을 많이 쓴다. 그래도 토속말의 정서는 아무래도 시래기에 있는 것 같다. 시래기 하면 어쩐지 슬프고 아린 느낌이 가슴 밑바닥을 싸하게 울린다. 김장채소를 거두고 난 빈 밭에서 시래기를 줍던 부르트고 언 손등이 생각나서일까. 아니면 시래기로 연명하던 가난한 민초들의 한 토막 지난 역사가 스쳐서일까. 올해도 채소전에는 시래기가 되지 못한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일 것이다. 세상살이에서 버릴 것이 많다는 것은 무언가 잘못되어서다. 시인의 눈에는 그것이 보인다.

   제일 먼저 버림받은 것도 저들이다/ 그나마 오래오래 푸르른 날들을 지켜온 저들을/ 기억하는 손에 의해 거두어져 겨울을 나다가/ 사람들의 까다로운 입맛도 바닥나고 취향도 곤궁해 졌을 때/ 잠시 옛날을 기억하게 할 짧은 허기를 메우기 위해/ 서리에 젖고 눈 맞아가며 견디고 있는 마지막 저 헌신. -도종환의 시 ‘시래기’ 에서- (함안예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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